인도 여행(라즈기르)
순례길 동참한 지 7일 째.
오늘의 목적지는 라즈기르로 부다가야에서 멀지 않지만 그래도 두 시간을 달렸다.
영축산은 능선에 있는 바위가 독수리 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으로 부처님께서 성도 후 이곳에 머무르며
많은 설법을 하신 곳으로 당시 인도내 여러 왕국 중 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왕성이 가까이 있어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마차를 타고 다닌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마차바퀴 자국
영축산 정상의 기도처
이른 아침임에도 멀리서 온 타국 승려들의 순례단도 보인다.
구 왕사성터 가까이에 지어진 죽림정사는 불교교단의 최초의 정사였으나 그 흔적은 남아있지 않으며
약간의 대나무와 카란다 연못이 있어 정사의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사리푸트라,목갈리나,마하가섭존자가
귀의 하고 코살라국의 상인 수닷타장자가 친구한테 놀러 왔다가 부처님을 뵙고 귀의하기도 해 불교 교단이
본격적으로 형성이 되고 교화가 시작된 의미가 큰 곳이라고.
죽림정사는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의 길을 떠날 때 승단이 망하지 않는 7가지 법을 설하고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로 발을 옮긴 곳이기도 하다.
죽림정사를 나와 약간 걸어가면 부처님과 제자들이 즐겨 찾았다는 온천정사가 있다.
온천을 하는 사람들도 붐볐는데 여기서도 카스트제도에 따라 계급별로 따로 목욕을 한댄다.
사진은 천민들이 이용하는 곳이고 윗계급은 접근이 용이치 않아서 패스.^^;;
목욕이 끝나면 이곳으로 와 힌두신으로 부터 축복을 받는데 물론 맨입은 아니다.^^;;
마하가섭의 거처로 추정되는 핍팔라석실을 지나 산 정상으로 가니 칠엽굴이 나타난다.
칠엽굴이 유명한 것은 부처님 열반 후 사람들 각 자의 생각과 의견이 분분해지자 이를 우려하여 가섭존자가
아라한과를 득한 장로 500명을 모아 부처님을 시봉했던 아나존자와 함께 부처님께 들었던 말씀을 대중들이
하나 하나 확인하여 확인된 것만 경전으로 인정하였다고 하고, 이를 1차 결집이라고 하며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하여 의미가 있는 곳이란다. 좁은 장소에 이번 순례길에 참석한 일행 500명이 앉아 옛날에 있었을 회합을
그려보는 것도 또 다른 감정을 이끌어냈던 것 같다.
굴 앞에서 공양할 꽃을 파는 상인
이곳 정상에는 힌두사원이 있어 몸이 불편한 신도들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오르내리기도 한다.
나란다 대학은 부처님 열반 후 불교가 번창 할 때 세워진 세계 최대의 대학이었다.
7세기 경 중국의 현장법사가 방문했을 때 교사가 1,500명, 학생이 만여 명에 달했다고 하나 이 후 이슬람침공으로
불태워져 흙더미속에 파묻혔다 5세기 굽타왕조 때 건물이 갖춰지고 7세기,9세기 때 증축이 되어 발굴한 유적에서
증축된 흔적들이 겹쳐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9세기 경 신라의 혜초스님이 중국을 거쳐 3년에 걸쳐 이곳으로
와 유학을 했다고 한다. 아마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중국 돈황에서 머물며 왕오천축국전을 집필하고 그곳에서
입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혜초스님이 정진한 곳으로 추정되는 석굴이다. 겨우 들어 갈 정도로 비좁은데 각 방마다 이런 공간들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