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바이샬리)
드디어 바이샬리입니다.
부처님이 사랑한 도시,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신심이 가장 돈독했고 한번도 음해한 적이 없었던 도시,
당시 북인도에서 가장 교통,문화,경제적으로 발달했었고 새로운 사상을 영유하고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가
이곳에서 최초로 여성들이 출가하게 된 요새말로 여성해방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곳, 인도 최초의공화국으로
지금도 인도 국회가 개원 할 때면 이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에서 물을 떠가 성수로 사용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왕족출신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반이상이 천민출신이라고 하니 나라가 망해서 왕족들이
천민으로 몰락했거나 아니면 있는 사람은 떠나고 천민만 남아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병을 얻고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선언하시고 80노구를 이끌고
열반의 길을 떠날 때 라차비족들은 이별을 아쉬워 하며 칸타카 강까지 따라 왔다고 하고 강을 건넌 부처님이
발우를 물에 띄워 보내 강변에 남아 계속 아쉬워 하는 라챠비족들을 달랬다고 합니다.
유녀 암라팔리의 공양 이야기가 남아 있고, 열반 후를 걱정하는 아난존자에게 자기 스스로가 등불이 되고, 스스로가
의지처가 될 것이며 마땅히 진리의 법을 등불로 삼아 진리의 법을 의지처로 삼되 부디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는 유명한 "자귀의 법귀의"를 설하신 곳입니다.
이곳에는 부처님 열반 후 8등분한 사리를 이곳에 모셔 사리탑을 세웠으나 아쇼카왕때 이를 허물어 전 세계로
불교를 전파하면서 각 국으로 사리를 보내고 인도 전역에 팔만 사천 개의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팔만 사천이라는 말은 억수로 많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불경에 나오는 원후봉밀터가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이 제자들과 걸식하러 나가 자신의 발우를 제자들 것 속에 섞어 늘어놓았는데 원숭이가 그 많은 발우중에서
부처님 것을 골라내어 꿀을 가득 채워 부처님께 공양하였다고 합니다."**
그 원후 봉밀터에 온전한 아쇼카 석주가 남아 있고 카라우나 포칼 연못이 있습니다.
캐사리아 대탑은 부처님이 라챠비족과 아쉬운 이별을 했던 장소에 라챠비족이 세운 세계에서 제일 큰 탑이었다고 합니다.
발우 모양을 했다고 해서 발우탑이라고도 하는데 많은 세월에 벽돌이 흙이 되어 덮어 버려 아직도 발굴중 인데 한쪽은 여전히
나무와 풀들로 남아있습니다.
**참고: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정토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