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도 여행(쿠시나가르)

몬~ 2015. 1. 29. 08:02

전날 일정이 늦어져 못 갔던 춘다의 공양터를 새벽에 들름으로써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대장장이 춘다는 날씨가 가물어서 모두가 기근에 허덕일 때 선뜻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겠다고

했고 이를 수락한 부처님은 그 공양을 드시고 탈이 나셨습니다.

이에 모두가 춘다 때문이라고 말 할 때 부처님은 여래에게 한 최상의 공덕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여래가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려고 할 때 받들어 공양을 올린 사람과 둘째는

여래가 열반을 하려고 할 때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이다 라고 대중을 다독였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같은 시기에 태어나기 힘들고 만나 뵙기도 힘들 뿐더러 공양올리기는 더더욱 어려웠기에

춘다의 공양은 지금도 불자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도 예의 힌두교가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불교 유적지가 불교쇠퇴 이 후 힌두교가 그 터에 사원을 세우고 자리를 잡아 요즘 관리 주체 문제로

다툼이 있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터지기 힌두교도인 브라만

 

 

 

부처는 열반에 들기 전 쿠시나가라 성중에 있던 수바드라라는 바라문(브라만)을 마지막 제자로 거두면서

여덟가지 바른 길-팔정도-를 설하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처와 법과 승가에 대해서 의심이

있거나 도에 대해 마땅히 의심이 있으면 지금 물으라" 하고 낙수물이 떨어져 돌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이 끝없이 정진하라며 최후의 설법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왜 문득 예비고사 앞두고 정신없을 때 독려하시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생각났는지...또 다니던

사찰의 노스님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못 미더운 제자들을 격려하시던 모습에서 자상한 스님 할아버지를 떠올린 것은 착각이었을까요?

아님 그냥 불량감자라서??^^;;

 

인도의 장례풍습은 사체를 천으로 감싸고 발을 내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잘못 해석한 중국 승려들에 의해 부처님의 발이 관 밖으로 나왔다고 곽시쌍부(槨示䨇趺)라는

말을 전해 절에 가면 간혹 관 밖으로 발이 나온 그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열반당

 

 

 

 

 

부처님은 머리를 북쪽에 두고 오른쪽 옆구리을 바닥에 붙여 누우셨는데 이렇한 모습의 와불은 태국의 왓 포나

화순의 운주사 등 에서 쉽게 볼 수가 있고, 왜 하필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셨을까 하는 생각에는 부처님의

여정을 짚어 보면 아마 고향인 북쪽의 룸비니로 가시던 도중 병이 깊어져서 그러셨지 싶습니다.

 

라마바르총은 쿠시나가르 말라족의 족장이 대관식 올리는 성스러운 곳이었으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이곳을 다비장으로 차려 다비를 행하였던 곳입니다.

 

다비장 터

 

다비장 유적지에서 수행중인 승려들

걸식을 엄격히 지키는 중이라 외지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시하는데 주저했던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오늘 여정의 끝은 네팔땅에 위치한 부처님 고향인 룸비니.

국경에서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500명분을 받을려면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부지런히 달려 가던 중 그만

펑크가 났습니다.

네팔 국내 사정상 국경이 닫혔다가 그제사 열렸다는데 통과하기도 전에 그만 발병이 나버렸습니다.

 

이름모를 시골에서 시간 때우느라 여기 저기 기웃거려보고...문득 솜 타는 것을 보고 원산지가 인도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무사히 바퀴를 교체해준 간이정비소 부자

 

 

어둑해진 국경 다행히 인도와 네팔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문을 닫지 않았고 먼저 인도 출국비자를 받고 네팔 입국비자를

받고 하다보니 두시간이 훌쩍 지납니다.

스산한 국경의 밤.

네팔에 위치한 식당만 땡잡았습니다. 인도와 같은 루피를 사용하지만 인도루피가 환율이 높아 1:0.6 정도였던 것 같은데

얄짤없이 인도 루피로 받고 거기다 덤으로 바가지까지...ㅉ!

 

 

여튼 500명이 한꺼번에 몰리니 쥔장은 휘파람을 불지만 요리사들은 불난 호떡집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