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동북아 역사기행(8)

몬~ 2017. 9. 1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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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일 년 여 만에 다시 찾은 백두산은 구름에 가리워져 있어 깜깜이입니다. 두어 시간을 기다려 봤지만 끝내 모른 척하는 백두산을 내려 올 때 일행 중 누가 그러더군요.

괜히 백두산이 아니라고, 백 번 와서 두 번 볼 수 있다 해서 백두산이라고 한다고.

아니면 백 명 중에 두 명만 볼 수 있어서...참,나.

 

작년에 왔을 때의 전경입니다.

 

 

 

 

*장백

늦은 밤에 도착한 장백현은 인구가 2만 남짓한 곳입니다. 건너편에는 북한 혜산시가 있는데 이곳은 강폭이 좁아 탈북민들이 많이 넘어 오는 곳이기도 하고 대다수가 다시 잡혀 넘겨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두산 줄기 자락이라서 산을 타고 넘어 갈 수가 없고 나가는 길이 두 군데인데 두 곳 다 검문소가 있어 빠져 나가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북한과 중국은 범죄인 인도협약이 되어 있어 넘어 오는 탈북민은 범죄자로 규정하고 바로 북한으로 보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인권문제 제기에 중국이 반응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곳 장백현은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북경으로 진출한 누루하치는 고향의 만주족을 데리고 가면서 백두산 일대를 200여년 넘게 봉금지역으로 지정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지만 조선의 민초들은 관리들의 폭정을 이기지 못해 강을 넘어 와 작물을 가꾸고 넘어 가거나 아예 한 철을 이곳에 머물면서 수확을 해서 돌아갔다고 하며 이를 적발하는 청나라 관리들과 전담 조선 관리들이 있었다고 하니 꽤 많은 조선 백성들이 넘어 온 것 같고 한편으로는 간도의 이민사가 오래되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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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탑

장백현에서 1km 떨어진 탑산의 서남 끝 둔덕에 서있습니다. 이 탑의 본래 이름은 모르고 발해시기의 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영광탑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 한무제가 기거했던 영광전이 풍파를 이겨내고 의연하게 오늘날에 이름을 기려 영광탑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탑산에서 맞이하는 새벽의 여명에 물든 혜산시는 바로 코앞입니다. 도시 뒤로 완만하게 펼쳐지는 개마고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려서부터 익히 들었던 개마고원은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압록강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뙈기밭으로 수놓아진 능선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짠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혜산시의 여명. 중간 아랬쪽 우측으로 완만하게 올라가 압록강을 따라 이어져 가는 것이 개마고원입니다.

영광탑

혜산시

장백에서 림강까지 내려 가는 길은 압록강이 함께합니다.

이른 아침길인데도 차창밖 풍경에서 북한주민의 뗏목이 흘러 갑니다. 영월에서 나무를 벌목하여 한강까지 내려 보낸다면 요즘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언제쩍 벌목산업인데... 다시 한번 가슴이 짠해졌고 건너편 산자락이 헐벗어져 있는데서는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치 못했습니다.

 

 

 

*집안

집안은 압록강 중류 북한의 만포 건너편에 있는 인구 20만의 소도시입니다.

유리왕 22년(AD3년)에 졸본에서 집안으로 서울을 옮긴 이후 이곳은 장수왕 15년(AD427년)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서울이 되었습니다. 집안이 고구려의 가장 오래된 수도였음에도 1965년 3월 8일 고구려와 전혀 상관없는 지명을 붙여 현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중국 입장에서는 역사적으로 수, 당을 물리친 고구려의 역사가 못마땅하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도 이곳에 있는 환도산성을 들어가면 관리인이 따라 다니며 유적지에 가까이 못 가게 하는 걸 볼 수 있고, 산성 아래의 고구려 돌무덤들을 발굴하면서 한국인들을 가까이 못 오게 하고 심지어 국내 학자들의 접근을 일체 금하고, 국내성의 경우 성안에다 아파트 단지를 조성해 놓아 이들에게 타국의 역사란 자신들 편의대로 부여하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비단 여기뿐만 아니라 차하이,싱릉와와 훙산문화 유적지(내몽고와 선양사이의 B.C6000~4500 여년 전 생성된 유물지)는 아예 한국인들이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선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도 공개를 안할 뿐더러 그 외 발해 유적지 발굴도 마찬가지로 한국학자들에게도 공개를 안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여기까지 가는 코스였는데 깊이 감취두고 있으니 동북공정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엿보여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단군조선에까지 이어지는 차하이,싱릉와와 훙산문화는 꼭 가봐야겠습니다.

*환도산성

고구려 대표적인 산성으로 같은 지역 내의 국내성과 함께 하나의 방어체계를 이루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도읍지이고 환도산성은 비상시에 군사들이 가서 방어를 하고 임금이 피신해 있으면서 저항하던 곳으로 , 나라가 위급할 때는 환도산성이 궁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곳 아래쪽에는 오랜 세월 수도 방어 산성으로 역할을 해오면서 많은 돌무덤들이(1,582기)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무덤은 돌로 몇 개의 기단을 쌓고 맨 위에는 모자를 덮어 놓은 것처럼 큰 돌을 얹는 적석무덤의 형태로 이런 형식의 무덤은 차하이,싱룽와와 훙산문화에서 볼 수 있고 중국에는 없는 독특한 무덤입니다. 이곳도 발굴이라는 명분아래 출입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환도산성 전경

환도산성에서 내려다 본 집안시(국내성)

환도산성의 망루

산성 밑의 고구려 돌무덤들

 

 

*국내성

국내성은 제2대 유리왕부터 제20대 장수왕 때 까지 400여 년간 통치하던 정치의 중심지입니다. 집안의 국내성이나 평양의 안학궁은 모두 내성이 없고 외성 하나뿐인 단일성입니다. 이곳은 중국이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으며 현재 있는 아파트는 30년 내에 허무는 단서조항을 붙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