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8/22 까지 좋은벗들을 통하여 청년팀들과 함께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까지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발해와 고구려 유적지 그리고 백두산에 이르기 까지 10일 동안 열심히 돌아다니다 왔습니다.
일정도 일정이려니와 보는 곳마다 우리의 역사와 애환이 깃들어 있어 그냥 일자별, 유적지 순으로 적어 보려 합니다.
2017.08.13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톡.
러시아의 극동지역의 유일한 부동항, 그래서 극동함대사령부가 있는 곳, 2012년 에이펙회의가 열렸던 곳,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출발하는 곳, 영화 베를린에서 하정우가 북한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권하는 목적지...
동북아 역사기행의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하는 날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여 여정이 과연 잘 이루어질 수가 있을까하는 우려의 마음이 자연스레 듭니다.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로 간 곳은 초기 항일민족운동이 활발했던 신한촌 기념비입니다.
1870년대부터 한인들이 집중하기 시작해 1891년에는 840명에 이르렀고 이에 시에서 구역을 정하여 카레이스카야슬라보드카(한인촌) 혹은 개척리라 부르던 이 지역은 신한촌 성립 이전 한인 집단 거주지였으나 1911년 콜레라 창궐을 이유로 2키로 떨어진 산비탈로 강제로 이주케 하였지만 지금은 이곳도 아파트로 둘러 싸여 기념탑만 흔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악착같은 의지로 이곳을 일궈낸 한인들은 1915년에는 1만 명으로 늘었고 항일민족지사들이 모여들어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활동인물로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이진룡 등의 의병장들을 필두로 그동안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이상설, 이위종, 안창호, 박은식, 신채호, 이동휘, 백순 등) 그리고 이곳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물이었던 최재형, 최봉준, 문창범, 김학만 등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일제는 영사관을 이곳에 두고 신한촌을 중심으로 한 항일민족운동의 동태를 감시하였습니다. 초기에 한인활동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권업회의 항일민족운동입니다. 권업회는 조국독립을 우한 계몽활동과 민족주의 교육, 농상공업 등 실업 권장을 통해 한인사회의 정치적 지워 향상을 도모하고 독립전쟁론을 실현하는 것을 최고이념으로 삼았습니다.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이한 1999년 8월 해외한미족연구소가 고려인들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는 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했던 당시의 신한촌 위상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세 개의 기념비는 1919년 국내에 만들어진 한성임시정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톡에 만들어진 대한국민회의를 상징한다고 하고 또는 가운데 큰 비는 남한, 왼쪽의 작은 비는 북한을 오른쪽의 가장 작은 비는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동포들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두 번 째로 간 곳은 독수리전망대입니다.
이것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시내 전경이 다 보이고 전망대에는 키릴형제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들은 동로마제국 그리스에서 태어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여 동유럽과 러시아 등지를 기독교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문자를 전하기 위하여 알파벳 석판을 짊어지고 오다가 엎어지는 바람에 글자들이 뒤섞이고 뒤집어져 오늘날의 소련 말이 되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극동함대사령부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서
중앙광장은 혁명전사 광장이라고도 하며 중앙에는 1917-1922년 극동지역에서 소비에트 정권수립을 위해 싸운 병사들을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라즈돌노예역
80여 년 전 고려인들이 겪어야 했던 통한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간이역입니다.1937년 9월 17일 새벽 4시에 연해주에서 터를 일구던 고려인들이 집과 재산을 두고 영문도 모른 채 이 역에 집결해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버려졌습니다. 강제 이주 전인 1936년 한인 지도자급 250명을 특별한 죄목도 없이 처형시키는 주도면밀함을 감춘 채로. 소련의 공식문서에 의하면 9월부터 10월 까지 124대의 수송열차에 36,442가구 총 171,781명이 열차에 실려 40여일을 달려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이동 기간 중 굶주림과 홍역, 학질, 추위 등으로 노약자의 60% 가량이 사망하였는데 사망자 수가 11,000명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을 추위와 배고픔으로 1/3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강인함은 당시 소련의 모범 집단농장 대부분이 한인들이 운영하던 농장이었고 소련 전체 노력 영웅 1,200여명중 750명이 고려인이었다는데서 나타납니다.
훗날 강제이주의 사유로 고려인에 의한 간첩 행위 근절이라고 했지만, 고려인이 외모가 일본인들과 비슷해 식별하기 어렵고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우며 청나라 간도와 인접하고 있어 장차 일본과의 전쟁에 악재로 작용할 우려가 있고 중앙아시아 황무지 개발로 전시 군량미를 확보하려는 측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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