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동북아 역사기행(9)

몬~ 2017. 9. 12. 21:05

8/20

이른 아침 일어나 일정을 최대한 지켜 볼려고 국동대혈을 찿아 길을 나섭니다.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가면 큰 대혈이 있다는 뜻으로 집안에서 17km 떨어진 산봉우리 정상부분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83년 5월 집안현 문물조사대에 발견되었습니다. 고구려왕들이 이곳에서 나라의 중요제사를 지냈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며칠 전의 장마로 낙석이 떨어지고 있고 다리가 일부 손실되어 기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갈 자신이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못가고 5회분 5호묘를 찿아 나섭니다.

*5회분 5호묘

5호묘는 현재까지 집안에서 확인된 20여기의 고구려 벽화 고분 중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일반의 내부관람이 허용된 곳입니다.

5호묘는 반지하 반봉토 무덤입니다. 묘실을 지하에 만들어서 지상에서 묘실까지 내려가는 무덤길을 경사지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벽화 발전과정은 생활도(3~4세기)-과도기(4~5세기)-사신도(6~7세기)로 이어지는데 5호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중국의 신인 신농씨,복희씨 그림이 같이 그려져 있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해석상의 문제는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미공개 중인 다른 묘

 

 

 

*장군총

장군총은 방단계식 적석무덤인데 아래부터 계단을 쌓으며 올라가면서 계단에 홈을 파서 밀리지 않도록 하였고 모두 7계단 22층을 1,100개의 돌을 쌓았는데 돌들이 밀려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큰 돌로 받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대기에 묘옥을 지었는데 지금은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삼국사기에 묘상유옥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개토왕비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만든 것으로 높이 6.39m 너비 1.34에서 2m로 비문에 호태왕이 이룬 업적을 기록하고 건국부터 호태왕 까지의 역사도 기록하였습니다. 모두 1,775자의 글자 중 1,570여 자를 판독할 수 있습니다. 이 비석의 의의는 첫째, 비석에 실려 있는 기록이 그 당시 역사에 대한 공백을 메꿀 수 있고, 둘째는 그 모양이 독특하다는 것입니다. 여느 비와 달리 반지르르하게 다듬지도 않고 비액도 없으며 돌을 자연스럽게 다듬고 글자를 새겨 이런 형태의 비석은 동방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광개토대왕릉

태왕릉을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보는 이유는 비문이 500미터 거리에 있으며 무덤에서 태왕무덤이라고 새긴 벽돌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태왕릉은 지금까지 알려진 네모난 계단식 석실묘 중에서 제일 큰 것입니다. 66m의 둘레, 13m의 높이,1,318평의 넓이는 장군총의 네 배가 넘고 높아 마치 작은 산처럼 보입니다.

여기도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어 릉에 올라 갈 때부터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5호묘에서 부터 장군총과 호태왕비와 릉까지 무엇을 그리 감추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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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본산성

홀본산성은 고구려 첫 서울이며 흘승골성이라고도 합니다. 중국 현지에서는 오녀산성이라고 쌩뚱맞게 지어 부르는데 고구려라는 나라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보입니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이 부여에서 동부여로 도망 와 왕의 딸이었던 연상의 과부 소서노와 결혼을 하여 동부여를 승계합니다. 하지만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고 외지인이 왕으로 올라가는 걸 곱지 않게 여기는 시선을 느꼈는지 이곳 천혜의 요지에 산성을 짓고 고구려를 건립합니다. 주위에 적들이 많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산성은 높은 봉우리에 위치하며 깎아지른 절벽같이 솟아오르는 모습이지만 절벽 위는 아주 평평합니다. 이곳 주변에는 고구려 고유의 적석총들이 많이 있었는데 저수지를 짓는 바람에 수몰되었다고 합니다.

 

 

 

 

 

*백암산성

현재 연주산성이라고 통일시켜 부르는데 이 또한 고구려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연나라때 산성이라고 덮어씌우는 작업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은 양원왕 3년에 개축하였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분쟁의 소지가 있습니다. 압록강 이북의 여러 성중에서 가장 웅대하고 견고하게 쌓은 산성이 백암산성입니다. 고구려 산성이라고 주장하는데는 축성술이 고구려 특유의 돌생김새가 방추형이며, 고구려성의 또 다른 특징이 성 안팍에 모두 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성 중에 평야지대에 쌓은 토성인 안시성과 요동성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백암산성은 석성이라서 비교적 원형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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