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은 심양에서 마감이 됩니다. 심양은 옛이름이 봉천으로 1625년 청조가 랴오양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성경이라 칭하다가 1644년 베이징으로 국도를 정한 뒤에 이곳을 배도로 삼았던 곳입니다. 이곳은 한나라가 위만조선의 영역에 설치했던 한사군중 하나인 현도성이 있었고 근대사에 이르러 독립운동의 본거지였으면서 일본영사관과 헌병대와 감옥이 있던 곳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지사들에게는 한이 맺힌 도시입니다. 현재는 길림성의 연변자치구 보다 심양을 중심으로 흑룡강성 하얼빈 인근까지 약 220만명 정도의 조선족이 살고 있으며 연변자치구는 80만정도가 살고있습니다.
시내에 있는 라마교사찰
예전에는 여기서 내몽고지역 까지 올라가 우리 한반도의 기원을 볼 수 있는 요하문명의 유적지인 청츠산, 싼줘덴, 홍샨 등을 둘러보았는데 발굴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기존 발굴 유물에 대해서도 중국이 공개를 하지 않고 있으니 향 후 양국 사학자들의 과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중국은 중국문명은 황허문명이라는 중화주의를 고수해 왔는데 오랑캐라는 동이의 발해만 일대에서 나온 요하문명은 황하문명보다 무려 2천년 이상을 앞서고 있어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인 쑤빙치는 동이의 랴오허문명과 한족의 황허문명이 조화를 이뤘으며, 여기에는 남방, 서북문화가 중원으로 모여 오늘날의 중국문명을 완성했다고 두루 뭉실하게 결론을 내릴 만큼 획기적이고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릴 적 식민지사관에 정립된 국사책에서 우리는 단군과 기자는 전설이거나 중국의 지배를 나타낸다고 배웠고 한반도의 문명은 시베리아에서 발원된 스키타이문명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배웠지만 그것이 사실은 중국인이라고 했던 기자 또한 고조선의 후예였고 상나라가 망하면서 고조선으로 돌아와 양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최근에 발굴된 유적지와 유물과 사료에서 입증되고 있으며 식민지사관을 고스란히 전해 준 이병도박사도 1986년10월9일에 조선일보의 사설에서 단군조선은 실재했다고 한 바가 있습니다. 이미 발굴사실이 1980년 중국을 흔들었고 이 사실이 언젠가는 양국 간의 쟁점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인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들이 노망들었다고 책망을 했다고 하니 아이러니할 따름입니다. 요하문명에서 발굴된 청동비파동검은 한반도에서 이미 여러차례 발굴되었고 옥으로 만든 귀걸이나 역시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된 무늬있는 토기 또한 요하문명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하문명만이 가지는 석축형태의 축성술은 중국내륙에서는 볼 수 없지만 발해만의 고구려와 발해성에서 그리고 한반도내에서 볼 수 있고 마지막 형태의 축성인 조선시대 수원화성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어 그 연결고리를 알 수 있고 그 연결선상에서 존재했던 고조선 또한 실제역사였음을 우리는 모른 채 일본인이 쓴 역사를 신봉한 역사학자들의 말만 배워왔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미명 하에 주변국들의 모든 문명을 중국문명의 지류로 몰아가는 추세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는 없다는 사실을 이번 기행에서 배웠습니다.
참조문헌: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성인당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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